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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유연성(Flexibility)

며칠 전에 손녀딸(4살 반)을 봐주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손재주가 제법인 그 애와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십대용이어서 재료의 양과 종류가 엄청 많았다. 디자인 샘플을 스마트폰으로 보아가며 차근차근 순서대로 엮어가던 중에 한 조각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완벽주의자인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고 있으니 “할머니 이걸로 대체하자 그리고 I need a break, I’ll be back” 하며 자리를 뜬다. 4살 반짜리 여자아이의 현명한 결정과 행동에 고지식하고 유연성이 없는 이 할머니가 한 방 얻어맞았다.     또 한 번은 일 년 전에 우리 온 가족 8명이 올바니에서 모일 기회가 있었다. 그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백화점(?)에 잠깐 들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아이스크림 종류와 토핑이 정말 1000가지도 넘는 듯했다. 어린이들을 유혹하기 좋게 사인과 벽화가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긴 줄에 서서 한참 동안 기다린 후 그 애 차례가 되었다. 판매원이 “what would you like?” 라고 묻자 “I want a brownie”한다. “Excuse me?”하고 판매원이 물으니 “I want a brownie” 단호하게 말한다. 큰 아이스크림 그릇에 조그마한 피스의 brownie는 정말이지 빈약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때 나도 배보다 눈이 고파 큰 용기에 여러 가지로 화려하게 장식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그 크기에 압도당해 “할머니 것 좀 줄까?” 하니 “Nope” 하면서 단칼에 거절한다. 우리 가족은 물론 그 광경을 목격한 주위 사람들까지도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뺐다.     참 기특하고도 자신의 의사표시가 분명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한 살 때부터 데이케어에 다닌 그 애의 행동이 자신만의 개성인지 아니면 미국교육의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온 나보다 유연함과 단호함을 갖춘 그 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 오전 요가 시간의 끝맺음으로 ‘오늘 여러분은 몸의 유연성을 위해 여기에 왔지만 이에 못지않게 마음의 유연성도 중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 듯이 유연한 몸에는 유연한 마음이 깃듭니다.’라고 강사가 말한다. 당연하고도 지당한 말이지만 한번 다시 숙고해볼 만하다. 바위는 세월과 풍파에 견디며 둥글어진다. 다시 말해 모난 부분이 곱게 다듬어진다. 우리 인간도 세월이 가면 둥글어지고 곱게 다듬어지는 걸까. 난 젊었을 때 많은 좌절과 번민으로 고통스러울 때 빨리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지혜로워진다고 믿었다. 살아보니 지혜롭다는 말은 다양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기 위한 요소 중에 유연성은 단연 으뜸이다. 교과서에 쓰여있는 대로 혹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밀고 나가면 현실과 많이 부딪히게 된다. 좌절과 실망이 심하면 절망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감이 없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발버둥 치는 일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그렇다고 포기 후에 자책하고 자학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에는 항상 차선이 있는 법이다. 유연성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로 빠질 경우도 있다. 높이 있는 포도를 따 먹을 수 없을 때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이 날 거야’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자기 합리화도 크게 바람직하지 않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룰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갈 수 없다면 목표를 바꾸거나 다른 길을 찾아 실현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람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누구나 좌절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도 있기 마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번 선택한 삶을 끝까지 우기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 잘못도 인정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꿈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길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flexibility 유연성 아이스크림 백화점 아이스크림 그릇 아이스크림 종류

2024-11-18

[삶의 뜨락에서] 마라톤, 즐기면 힘들지 않아요

뉴욕시티 마라톤 19번째 출전이었다. 출전번호 12491. 아침 5시에 자이언트 스타디움에서 버스를 타고 스태튼 아일랜드 베라자노 브릿지 밑에서 모였다. 15번 이상 참가자는 우대해준다. 벌판에서 떨지 않고 건물 안에 들어가면 커피, 따뜻한 물, 베이글까지 준비되어 기다린다. 50여명 넘는 사람들이고 48번 완주한 사람도 있다. 거의 20번 이상의 노장들이다. 그래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건강해 보였다. 특혜는 11시 30분까지 기다리지 않고 9시 10분 첫출발을 한다. 기다리는 것도 지겹지만 7시간을 달려야 하는 나는 오밤중에 센트럴 파크에 도착한다. 그 고통을 덜어주니 기다리는 가족도 훨씬 가벼운 마음이고 나 또한 햇볕이 있을 때 끝마치니 홀가분한 기분으로 출발한다. 엄청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면 썰물 빠지듯이 베라자노 브릿지 중간쯤이면 나 혼자 달린다. 이 넓은 다리가 완전히 내 차지다. 어느 누가 이 다리를 혼자 뛰면서 지나가겠는가.   브루클린 4가 중간쯤 가면 9시 45분 출발 팀이 지나간다. 힘이 넘치는 젊음과 바위도 쪼갤 수 있는 파워가 넘친다. 여자 선수들은 날씬한 다리에 포니테일이 박자를 맞추듯 출렁거린다. 이 팀은 마라톤의 진수를 보여준다. 구령을 외치는 사람도 없는데 박자를 척척 맞춰가며 팀을 만들어 군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달린다. 외국에서 온 선수들도 많다. 속도가 같은 부류들이 셔츠에 자기 나라를 표시했다. 한 번쯤 뉴욕 마라톤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달린다. 늦게 출발했지만 속도가 빨라 나 혼자서 달리는 일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커스텀이 많이 보였는데 이제는 운동복을 입고 뛴다. 그리고 외국 선수들도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은 드물고 모두가 젊은 청춘들이다.   달리고 있는데 다운 신드롬이 있는 학생과 같이 달리게 되었다. 묵묵히 앞만 보고 달린다. 길가에서 방울을 흔들며 목이 터지라 응원을 해준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해달라고 애원하면서 “You can do it, You are the best. Go”를 외쳐준다. 퀸즈 브릿지를 지나 1Ave65가에 들어서면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막이 터질 듯이 우렁차다. 75가에 우리 식구들이 모여 있다. 콜로라도에서 동생과 조카 2명 그리고 조카 아들딸까지 대식구가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를 응원하기 위해서 자리를 잡고 혹시나 찾지 못할까 설레면서 기다리다 내가 나타나니까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고함을 질러댄다. 몇 분 만나서 응원하려고 먼 곳에서 온 동생 식구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에 에너지를 듬뿍 받고 달린다.   뉴욕 마라톤 클럽에서는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들을 전문가의 도움으로 훈련한다. 특히 정신적 장애인은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서 지속해서 훈련을 반복하며 마라톤에 출전시킨다. 그들을 뒤따라가면 왼쪽 오른쪽에 가이드가 있고 한쪽 손목과 가이드 손목으로 줄을 이어 놓았다. 물이 먹고 싶다면 물을 주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화장실을 같이 간다. 가다가 짜증을 내면서 뛰지 않겠다고 길가에 더럭 주저앉기도 하고 팔을 뿌리치면서 울기도 한다. 울면 같이 울고 성질부리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달래고 얼리면서 앞으로 나간다. 어려운 고비마다 길가에 나와 있는 관객은 더 힘찬 박수와 딸랑이를 흔들면서 “You can do it”을 외친다. 다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면 “Good” 하면서 응원석에서도 달랜다. 그는 혼자가 아닌 모든 사람과 함께 한다는 공동의식을 느낀다. 장애인을 지도하며 교육하고 연습을 반복하는 이 어려운 과정을 뉴욕 마라톤 클럽에서만 하고 있다.   26마일은 나와의 긴 싸움이다. 시간 단축하려고 무리하지 않으면 연습한 데로 내 몸의 여건에 맞추어 달리면 그리 힘들지 않다. 여러 사람의 제각각 다른 점을 보면서 달리면 7시간이 그리 길지 않게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다. 이튿날 우리 가게 손님이 인스타그램을 가지고 왔다. 내가 웃는 모습으로 종착점에 들어오는 것을 찍은 사진이다. 손을 번쩍 들고 자연스럽게 잘 찍힌 사진이 어느 수퍼 스타와 비슷하다고 농담도 한다. 다른 손님은 꽃을 사 들고 와서 격려해 주었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마라톤 뉴욕시티 마라톤 뉴욕 마라톤 후천적 장애인들

2024-11-14

[삶의 뜨락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2)

지난겨울 모로코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당나귀가 짐을 나르는 좁은 골목 안의 작은 가게들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붐볐다. 멜랑꼴리하고 구슬픈 노랫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루에 다섯번 간격으로 들리는 이 노래는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물건 파는 것도 잠시 중단한 채,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깊은 절을 올렸다. 나는 단순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엎드려 기도하는 그들에게서 가슴 뜨거워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왔다. “신앙이란 자기 자신의 유한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초월하려는 정신의 개방이다.”라고 한 에디트 슈타인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갖기 이전에, 무엇을 갖느냐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여유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은퇴하고 난 뒤의 나의 생활도 더 바빠지고 있다.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책 ‘월든’에서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차분히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성조 아브라함, 야곱, 요셉, 이집트 탈출, 바빌론 유배에서 예루살렘의 귀환,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요한 8, 24-25)     수녀님의 지도, 그리고 필요한 것을 미리미리 알아 챙겨주는 이해심 많고 에너지 넘치는 길잡이님의 사랑과 함께 12명의 자매님이 하느님 앞에서 가슴 졸이고, 망설이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수줍어하면서 지냈던 그 많은 시간은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나는 순간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10월도 중반에 들어선 가을의 끝이다. 온통 붉게 물들어가는 숲속을 걸으며 3년 전 가을, 백주 간 성경 통독을 위해 퀸즈의 베이사이드 성당으로 찾아갔던 그 첫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너도 떠나고 싶으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도 들려온다. 주님 제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기억 모두 하느님 자연주의 철학자 가을 백주

2024-11-05

[삶의 뜨락에서] 인간의 숨결, 온기 4

인간의 고유한 힘, 진정한 힘은 개별성, 개체성, 고유성에서 나오는데 이성은 일반적 원리 속에 인간을 묶어놓아 그 생명력을 질식시킨다.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이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용서와 사랑이라는 이념이 피해자들에게 정신적 승리를 안겨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적 이념의 족쇄에 인간을 다시 가둘 뿐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예리한 지적인가. 소름이 돋는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수상해 화제를 모았었다. 영화 내용은 한 교사가 어린이를 살해한 후 결국 감옥에 간다. 살해범은 교도소에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얼굴도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신에 의지하기도 하며 오랜 시간을 고통에 시달린다. 자신이 그만 그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감옥에 있는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만나러 간다. 거기서 그녀는 자신은 그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는데 이 살해범은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았다며 밝게 웃는다. 누가 그를 용서했단 말인가. 세상의 그 어느 인간답지 못한 파렴치한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기독교적 사랑에 회의를 하게 만든다.     이런 세상의 부조리에 인간은 흔들리게 되고 위기를 맞는다. 인간의 존엄은 도전받고 이성은 부정당한다. 이성에 대한 회의감이 깊어 간다. 이성이 가져다준 과학과 산업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하면서 인간이 짐승과 구분되는 핵심적 차이점이 이성이라는 생각이 설득력을 잃어간다. 오히려 쾌락과 고통의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려는 과학적 시도가 설득력을 높여가고 있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동물적 본능을 설명하는 쾌락주의적 공리주의가 확산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정의한 ‘종의 기원’은 모든 생물 종은 자기 종을 번식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환경에 잘 적응해 생물학적 특성들이 변화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퇴화해 멸망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은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엥겔스는 자유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자본주의의 심각한 후유증을 개탄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을 가진 유산계급만이 시장을 독점하고 삶이 더욱 비참해졌음을 지적하고 실제로 부정의 한 사회구조 속에서 부르주아와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했음을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노동자들은 제도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자신을 꾸려나가는 통제권을 갖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노동자들을 해방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보장하는 개혁 또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삶이란 차가운 이성에 의해 포착되는 논리적 구조나 일반적 법칙에 있지 않고 개별적 환경에서 자신의 욕구와 부단히 부딪히며 자신을 실현해 가는 생명력이 삶의 본질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 후 나치즘과 파시즘의 국가주의적 전체주의가 이성과 개인의 존엄을 무시하고 폭압적 권위주의로 나갔지만, 전 세계를 냉전으로 몰아넣고 사회주의는 얼마 가지 못한 채 20세기 후반에 붕괴하였다. 그 후 하이데거, 니체, 사르트르, 카뮈 등의 실존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은 개인의 개별성, 고유성, 주체성을 찾아 나가는 것으로 새 주류를 이룬다. 타인과의 공감을 통해 자율적으로 타인도 나와 같은 희로애락의 정서를 갖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때 비로소 인간다움이 갖춰진다.     온라인이 기본 생활권이 되고 AI가 선택을 대신해 주는 삶의 장래가 밝지만은 않다. 나의 선택들이 모여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작가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답을 찾는 오랜 여행을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덕택에 우리는 편하게 인류의 역사, 철학을 이 책 한 권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깊이 삭히고 싶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숨결 온기 자본주의 경제체제 숨결 온기 개별성 고유성

2024-11-04

[삶의 뜨락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1)

일주일 내내 숨 가쁘게 지내다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흩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컴퓨터 앞에 오롯이 앉는다. 성경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모험이며 성취라고 한다. 나의 초기의 믿음 생활은 두려움이 대부분이었다. 가톨릭 교리의 죄에 대한 심각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들을 찾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을 우리가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부르면 부를수록 멀어져만 갔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찬양하거나 감사를 드리지 않고 허망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인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로마 1,22-23)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난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시력이 나쁜 늙은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본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이 광경은 내 안에 들어있는 경직된 그 무엇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작은아들이 되어 2000년 전의 그 날의 그 장소로 되돌아가 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아버지께서 받아주실까?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등등 수많은 번민과 후회로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미리 걱정했던 그런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깊은 사랑을 체험한 아들은 엉엉 울었을 것이다. 태초부터 있었고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의 사랑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고독과 분노와 외로움이 무한한 감사가 되게 하였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헨리 뉴우앤은 그의 저서 ‘탕자의 귀향’에서 말하고 있다.     아무리 흉악한 몹쓸 짓을 했더라고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하느님은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해 주신 분이시다. 만일 우리 생에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나의 잘못을 되돌릴 수 없는 삶, 용서받을 수 없는 삶, 고칠 수 없는 삶, 손실을 회복할 수 없는 삶,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완전히 패배한 삶,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돌이킬 수 없는 수치심으로 사는 삶일 것이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귀향은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기억 사랑 이야기 성경 말씀 세인트 페테르부르크

2024-10-28

[삶의 뜨락에서] 늙었기에 다음은?

나는 많이 늙었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소학교 중학교 때는 친우들하고 헛되게 보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작스럽게 “아, 인생이란 현재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걸 깨달았다. 인생에는 항상 ‘내일’을 준비해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학 때부터는 앞을 보고, 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길렀다. 한 달 후면 학기말 시험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서, 학기말 시험을 미리 준비해놓는다. 대학 졸업하면 군대에 가고, 군대에서 제대하면 미국에 가고…, 이처럼 미리 앞을 보면서, 앞일을 계획하면서, 앞일을 준비하면서 살아왔다.     젊었을 때, 서툰 영어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살아남았다. 언젠가는 나도 늙으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퇴직금을 저축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먹히면먹힐수록, 세월이 빨리 가는 것을 느꼈다. 나만은 안 늙어주기를 바랐는데, 바람은 소용없었다. 나는 늙고 말았다. 은퇴했다. 젊었을 때 준비해두었던 퇴직금이 있기에 밥걱정은 없다. 친우들을 만나 골프를 친다. 책을 읽으면서 태평하게 지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오늘 하루 살면, 내 생명이 하루 줄어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하루를 내가 ‘공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하루 사는 것’은, 실은 내 생명의 하루를 내가 갉아먹고 있다. 오늘 하루가 내 생명의 하루이니, 하루하루가 엄청 중요함을 알았다. 이 중요한 하루를 어떻게 해야 유용하게 보낼 수 있나? 하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무한정 늙어지는 것은 아니다. 늙음이 끝나면? 다음은 죽음이다. 죽음도 무한정이지 않다.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다. 낮이나 밤은 무한하지 않다. 어느 기간 동안 낮이었다가, 그리고 어느 기간 밤이었다가, 이처럼 낮과 밤은 윤회한다. 죽음도 어느 기간 동안 죽어 있다가 다시 태어난다. 삶도 어느 정도 살아 있다가 다시 죽는다. 삶과 죽음은 윤회하고 있다.     죽으면, 죽은 자들은 저승(하늘나라, 인간, 동물, 지옥)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만약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경우, 이 세상에 갓난아이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으면, 이 세상도 저승이다.     이 세상의 움직임은 연기(緣起)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어짐으로써 저것이 없어진다.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없어진다. 이게 인과응보이다. 선량한 행위는, 어느 땐가는, 좋은 과보를 받는다. 악한 행위는, 어느 땐가는, 나쁜 과보를 받는다.     늙었으면, 우리는 죽음을 채비한다. 이 귀중한 하루하루를,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저승에서 태어날 때,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날 준비를 해놓은 게 좋겠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가족하고 오순도순 지낸다. 친우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살생, 도둑질, 거짓말 등 남을 해치는 이를 해서는 안 된다. 남을 해치는 일을 하면, 인과응보라, 그 과보를 현세에서 혹은 저승에서 받게 된다. 남을 해치는 나쁜 행위를 많이 저지르면, 저승에서,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나기가 어렵다. 이미 못된 짓을 저질렀다면, 참회해야 한다. 가장 좋은 일은, 남들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조성내 /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 조교수삶의 뜨락에서 기간 동안 소학교 중학교 살생 도둑질

2024-10-23

[삶의 뜨락에서] 인간의 숨결, 온기 3

이런 배경 아래 새롭게 유대교가 주목받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대교의 근본 전통을 이루는 율법보다는 복음의 구원에 이르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교가 주목을 받게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혼란한 시기에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절대적인 힘을 갈구하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구원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자임을 선포한다.     밀라노 칙령이 공포된 313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된다. 그 핵심은 인간의 존엄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상적인 출발이었으나 교황을 중심으로 한 계급적 제도가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어 다시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고대사회 때부터 길들여진 계급적 사고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에 깊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기독교에 의해 심어진 평등 의식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려면 사회 환경이 변화될 필요가 있었고 평등한 개인의 존엄에 대한 의식이 더욱 숙성되어야만 했다. 의식이 숙성되기 위해서는 씨앗이 필요하고 이 씨앗은 기독교에 의해 뿌려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정신 즉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의지에 의하면 우리의 삶은 다양한 욕망과 이성 사이의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세 암흑기에서 기독교의 잠재력이 향상된다. 평등과 내면세계의 확장으로 존엄한 인간을 위한 전환기를 맞는다. 중세 후반기에 비로소 성장하는 평등의 정신,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기획하고 성취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성장해 간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자율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권리가 있으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 온전하고 자유로운 삶의 발견이 가능하며 개인의 이상과 꿈이 존중받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권리가 함께할 때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으며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중세라는 천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르네상스는 비로소 세계와 인간이 발견되는 계기가 된다. 암흑에서 빛으로 종교와 미신에서 이성과 과학으로 체제에 종속된 인간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전환되는 신호탄을 르네상스가 쏘아 올렸다. 인간은 이제 내적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된다.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끌어나갈 때 찾아오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이 진정 인간다움이다. 이처럼 중세 후반에 시작된 내면세계에 관한 관심이 르네상스 시대로 이어지며 자아를 가진 개인이라는 존재로 확장된다. 결국 인간다움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내부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스스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Pico Della Mirandola, Giovanni)가 1486년에 쓴 ‘인간의 존엄에 대해’ 중 “르네상스 맨, 너에게는 어떤 한계도 없으며 오직 너만이 자신을 위해 자연의 한계를 정할 뿐이다. 너는 너를 세계의 중심에 놓으며 거기서 네 뜻대로 세계를 둘러보고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너는 영예롭게 지명된 재판관으로서 스스로 틀을 짜고 제작하는 존재다. 너는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너 자신을 조각하면 된다.”라고 썼다. 르네상스의 확산과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공통으로 떠오른 화두는 개인주의, 개인의 자율, 개인의 권리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탄생한 이성은 근대에 개인이 탄생하면서 권위주의를 대체해 모든 이들이 자유를 누리면서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과학을 발전시켜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고 이전보다 더욱 윤택한 삶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은 삶의 질을 높이지만 하층민은 노동에 시달리거나 빈곤에 내몰리게 된다. 지식층은 이성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다. 니체(1844~1900)는 ‘인간이란 자기 안의 색채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개인의 고유한 틀 내에서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존재다.’라고 한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숨결 온기 숨결 온기 평등 의식 자율 개인

2024-10-21

[삶의 뜨락에서]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

이 에세이를 쓰기 전 잠깐 망설였다. 뉴욕, 뉴저지 한인 독자들을 상대로 시와 에세이를 쓰는 나 같은 무명인이 어떻게 감히 노벨 문학상 작가의 글을 말할 수 있는가. 어제 아침(10월 10일) 일터로 가는 시간, 급히 날아온 카톡 메시지를 보고 행복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드디어 해냈구나. 한국 뉴스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이어 한강 작가가 문학상을 받는 것은 나라의 경사라고 말했다. 내 개인 의견으로는 한강 수상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주어졌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은 좁은 한국문학의 지평을 전 세계적으로 끌어 올렸다. 경제적으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선 한국은 이제 문화적으로도 더 높이, 더 멀리 다가가고 있다.     수년 전 내가 안내하고 있는 영어 북클럽 시간에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본 ‘The Vegetarian’을 읽었다. 이 책이 맨부커상을 받은 직후였다. 이번에 한강 노벨 문학상의 대표작이 된 후 서가에서 찾아내 다시 읽었다. 이 책의 표지는 도전적이다. 붉은 바탕에 신비로운 검은 모습의 여인 형상이 그려져 있다. 붉은색은 피, 혁명을 상징한다. 저자는 유년 시절, 작가인 아버지 한승원으로부터  5·18 광주 항쟁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강은 불행한 한국 역사의 트라우마를 작품 속에서 승화하고 있다.     문학은 현실의 반영이다. 역사 소설(Historical Novel)은 사실에 의존하면서 주인공과 지명, 사건을 허구화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강의 문체는 노벨상 선정 배경설명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시적’이다. 그의 소설은 긴 산문(Prose) 같은 느낌을 준다. 상징적이고, 은유가 많으며, 간결하면서도 깊은 여운이 있다. 한강은 시로 출발했다. 시인이 쓰는 소설은 자연이나 사건 서술에 ‘인간성’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간다. ‘노인과 바다’ 등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노트르담의 곱추’의 저자 빅토르 위고는 모두 시인이었다. 이밖에 수많은 작가가 시로 문학을 시작했고 그래서 글의 흐름은 걸리는 데가 없이 음악처럼 출렁인다.       한국 문학 작품이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뛰어난 번역이 필요하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영어로 옮겼다. 내 생각으로는 한국인 번역보다 (이름으로도) 원어민 번역이 독자들에게 더 어필 할 것 같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도전적이다. 주인공 김영혜는 꿈에 그동안 먹은 동물들이 나타나 괴롭힘을 당한 후 채식주의자가 된다. 딸이 고기를 먹지 않고 말라가자 부모는 강제로 육류를 먹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녀는 고기만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식물로 간주한다. 화가인 형부는 처제를 누드모델로 해서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나무와 꽃을 그려 넣는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 몸에 그려진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혜는 정신병원의 뒷마당에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본다. 나무가 머리를 이고 서 있다고 착각한 그녀는 나무가 되기 위해 물구나무를 서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물과 햇볕만 있으면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또 이 세상의 모든 나무는 형제간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보다 식물을 더 사랑한다.     ‘The Vegetarian’은 180페이지의 짧은 소설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보다는 좀 길지만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작품이다. 소설의 한국어 원어본을 접하지 못했으나 영어 번역이 자연스러워 만족스럽게 읽었다. 한국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한국의 영어 교육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있으니 번역에 의존하지 않고 처음부터 영어로 집필하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원작자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채식주의자 vegetarian 노벨 문학상 한강 노벨 한강 수상

2024-10-16

[삶의 뜨락에서] 인간의 숨결, 온기 2

지난번에 김기현의 ‘인간다움’을 읽고 ‘인간의 숨결, 온기’라는 제목으로 한 페이지의 글을 올렸다. 책 내용이 인류사를 고대부터 미래까지 총망라한 방대한 내용으로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다움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어왔고 또 변화되어가고 있는가를 거시적으로 살펴본 지적 여행을 담고 있다. 한 페이지로 적어놓고 끝내기에는 너무 주옥같은 내용이어서 총 4편에 걸쳐 진정 작가의 심중을 헤아려보고자 한다.     작가는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공감, 이성, 자유(자율)라고 학문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풀어나간다. 쉽게 한 마디로 풀이하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바로 인간다움의 기본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타인을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존중하는 모습이 인간적이라고 한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끌리는 삶과 개척하는 삶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비로소 신의 명령에 따라 행위를 하는 수동적이고 운명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 능력으로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불과 도구의 사용, 손가락 사용 능력, 직립보행, 언어사용, 지능으로 자신을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에 올려놓았다. 수렵 생활을 접고 협력과 협동 같은 효율적인 결집력으로 대규모 집단을 만든다. 농업혁명, 물물교환을 통하여 내부의 결속을 위하고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고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칭송하게 된다. 신화의 세계관에서 완전한 개인은 없다. 제사 문화, 가부장의 권위, 그리스 문화와 유교 문화 모두 가부장 사회다. 가족 중심의 유대관계는 점차 공존의 단위가 확대됨에 따라 씨족과 부족을 거쳐 고대의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한다. 국가란 확대된 가족이다. 운명론과 신에게 자리를 내주고 인간이 조연으로 밀려난다.     BC 7~8세기경부터 인간도 삶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수동적 위치에서 개척자의 위치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성은 Logos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적극적 관심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성의 도전은 운명에 이끌리는 삶을 거부한다. 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성찰이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왔다. 좋은 삶이란 성찰을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 이성의 지휘 아래 욕망과 기개를 절제하는 삶이며,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행동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 후 인간은 내면세계라는 집을 짓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평등의 정신이 향상되고 내면세계에 관한 관심이 점차 깊어질 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기획하고 성취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 또한 성장한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위축시킨다. 그리스 시대는 이성의 전성기였다. 전쟁이 유럽을 휘몰아치면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이성이 두려움과 불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은 소실된다. 로마가 유럽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면서 만들어진 문명을 로마 문명이라 부르지 않고 그레코- 로마 문명이라 부른다. 그리스 문명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했음을 의미한다. 중세 시대는 처세의 철학이 되어 스토아학파도 현실적 욕망 너머의 이성적 덕을 추구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고통과 쾌락을 넘어선 영속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유럽 전체에 전쟁이 그치지 않으면서 혼란과 폭력의 세계에 위대한 신이 등장하게 된다. 유대교의 여호와는 그리스, 로마의 신들과 달리 압도적이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Logos(법칙)를 지배하지 못하고 물리계의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존재들이다. 유대교는 다르다. Logos 위에 선다. 암흑 같은 혼돈 속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 사람들은 자연의 질서에 종속되는 신보다는 그것을 뛰어넘어 질서 자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숨결 온기 숨결 온기 그리스 로마 그리스 문명

2024-10-07

[삶의 뜨락에서] 술 취한 나무들

어떻게 나무가 술을 마시고 취한단 말인가. 10여년 전 알래스카 여행에서 보고 느꼈다. 랜드-기차-크루즈를 포함한 2주 일정이었다. 리버 크루즈는 좁은 알래스카 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갑판에 나가 바다를 응시했다. 순간 큰 바위틈에 서서 심하게 흔들리는 나무를 보았다. 왜 나무는 바위에서 태어났을까. 추운 햇볕이야 받을 수 있겠지만 영양분은 어떻게 공급받을 수 있을까. 나무가 무척 불쌍하게 보였다. 나무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다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돌아와서 ‘술 취한 나무들’이란 시를 썼다. 너무 춥고, 외로워서 독주를 마셨어요. 용서해 주세요.   9월 22일, 일요일 아침 6시 50분경 바닷가 공원 산책을 나갔다. 해가 늦게 떠선지 어둠이 완전히 걷힌 것 같지 않았다. 공원 입구로 들어가는데 옆에 있는 크레일에서 한 젊은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모자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어두운 숲속을 걸으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을 들고 다닌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는 바다 가까이 가서 매트를 깔고 앉았다. 떠오르는 해를 보고 절을 하려는 무슬림인가?     바닷가 공원은 하루종일 분주하다. 동이 트고 공원이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사람들이 중국인 낚시꾼들이다. 요즘은 손바닥만 한 작은 고기가 잘 잡히는 것 같다. 10여명이 중국말로 떠들면서 낚싯줄을 던지고 고기가 물리기를 기다린다. 반나절에 작은 한 양동이는 잡는 것 같다. 이어서 개를 끌고 사람들이 나온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굿모닝, 나이스 데이 하고 인사를 나눈다.   나는 매일 빠른 걸음으로 땀을 흘리며 80분을 산책한다. 요즘 같이 낮 기온이 70도로 올라가는 날에는 노인들이 접는 의자를 갖고 나와 책을 읽고 오수를 즐긴다. 어떤 사람들은 점심을 가져와 하루 종일 지낸다. 일을 마치고 저녁 시간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어둠이 내리면 공원 관리인들이 차를 타고 다니며 나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공원에 정적이 찾아온다. 사람들이 떠나면 자연과 다람쥐들이 공원을 온통 차지한다.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파도 소리가 크게 들린다.   어제 산책에서 높은 전봇대 위에 새들이 집을 짓고 새끼를 낳은 둥지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어미 새가 떠난 것을 발견했다. 그 작은 부리로 어떻게 큰 가지를 물어다 집을 지었을까. 새끼들은 어미 품을 떠나고 집은 축이 허물어져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 내년에는 더 높고, 견고한 집을 지을 것이다. 바닷가 공원에는 거위가 풀밭에 쳐들어오고 잘 훈련된 개를 풀어 거위를 쫓는 차가 온다. 가을이 오면서 거위 떼는 줄어들고 새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잔디를 덮는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로에 작은 사슴이 차에 치여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차를 세우고 유심히 보았다. 숲속에서 불빛을 보고 달려온 사슴이었을 것이다. 짧은 가을이 지나면 공원은 한적해질 것이다. 나 같이 아침 산책을 일상으로 삼는 사람은 추워도 온몸을 감싸고 80분을 걸을 것이고 개를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노인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면 바닷가 공원은 인적이 뜸할 것이다. 마을 가까이 사는 나무들은 알래스카 바위틈에 있는 나무들만큼 외롭지는 않겠지. 독주를 마시고 바람에 흔들려 억지 춤을 추지도 않을 것이다. 어둡고 외로워서 긴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사람일 것이다. 해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바람이 얼굴을 때리면 나는 더욱 혼자가 될 것이다. 어둠이 싫어서 일찍 잠자리에 들고 여명이 밝으면 바닷가 공원에 나가 새들이 잘 있는지 두리번거릴 것이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나무 바닷가 공원 공원 관리인들 공원 입구

2024-09-25

[삶의 뜨락에서] 인간의 숨결, 온기

‘인간다움’(김기현)을 읽었다. 중앙일보에서 이 책의 저자와 책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를 읽었을 때 거의 50년 동안 잊고 지냈던 아련한 단어 ‘인간다움’이 나를 흔들었다. 맞다. 거의 50년 만이다. 1972~1976년까지 대학을 마치고 1977년에 뉴욕에 왔다. 내 인생에서 뇌세포가 가장 활발했던 때가 대학 4년이었다. 간호학을 전공하면서도 나의 마음과 관심은 오직 독서 동아리 ‘자유 교양회’였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대학 4년을 보냈다.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인간성 상실과 회복’이라는 삶의 과제를 안고 미국에 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이민자들이 겪어야 했던 문화적 충격과 언어장벽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했다. 특히 나는 완벽주의자에 결벽증까지 있는 편이다. 이민 생활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핑계로 ‘눈치작전과 적당히’라는 삶의 요령과 서서히 타협해 가고 있던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하고 괴로워했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이상적인 삶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당시 나는 이미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인간성을 갖춘 진정한 의사’가 되는 길이 가장 의미 있다고 결심하고 의예과에 지원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만 2년 공부 끝에 나는 탈진했고 쓰러졌다. 나에게는 이미 두 살, 네 살의 두 아이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단어를 잊고 살아왔기에 이 책을 신선한 충격과 설렘을 갖고 읽을 수 있었다.     저자 김기현 교수는 평생을 바쳐 철학을 공부하고 연구한 학자로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지적 여정을 이 책에 담고 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류가 쌓아온 지적 유산을 조망하면서 존엄한 삶의 가치가 어떤 과정을 겪으며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지, 이 도전과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쉽고 편안한 문체로 풀어간다.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 행복에 관한 생각이 달라지고 삶의 행동 양식이 달라지고 미래의 모양이 달라진다. 인간다움은 재능과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재능과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렸다. 이를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타인도 나처럼 희로애락의 정서를 갖고 행복을 원하며 자기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감정이입, 공감, 연민을 갖고 상대의 마음 상태를 읽어갈 때 상대도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존중하는 모습이 인간적이다.     인간다움이라는 성품도 몇 가지 재료들이 적절히 결합해 만들어진다. 사용되는 재료는 공감, 이성, 자유(자율)다. 공감은 문명이 시작되기 전에 형성되었고 반면 이성은 상대적으로 기원전 7~8세기경에 씨가 뿌려지고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능력으로써의 자율은 14세기 무렵이 되어서야 싹을 틔운다. 인고의 과정을 거쳐 인류의 자산으로 자리 잡은 인간다움은 19세기에 수난을 겪게 된다. 이때부터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우리의 세계관에 자리 잡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다움에 대해서는 인공지능과 생명과학의 결합으로 탄생한 새로운 기술로 전혀 다른 차원의 도전을 제기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기계에 의존하는 사이 인간다움을 이루는 자산의 힘이 묽어지고 있다. 사이버 불링(Cyber- bulling)은 공감 능력을 떨어뜨리고 인공지능이 선택을 대신 해주는 미래로 가고 있다. 빅데이터를 통해 데이터베이스가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데이터를 처리하는 알고리즘이 발전하면서 기계의 판단에 의존하는 일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인터넷 사회에서 밀려드는 정보에 매몰되어 SNS에 정보를 올리고 업데이트하고 가짜 뉴스가 판치는 유튜브에 정신이 팔려 중요한 일은 밀쳐둔다.     인간다움에 대한 생각이 시대에 따라 변하고 특히 현대사회에서 인간다움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가. 바쁜 미국 생활에 죽비 같은 울림을 준 단어, 인간다움! 나는 이를 인간의 숨결, 온기라고 말하고 싶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숨결 온기 숨결 온기 대학 생활 공감 이성

2024-09-23

[삶의 뜨락에서] 노학만리심(老鶴萬里心)

요즈음 포트리 공공 도서관을 드나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 10여년간 플로리다와 뉴저지를 왔다 갔다(Snow BIird) 할 때는 플로리다 집 근처에 있는 커뮤니티센터에 있는 도서관을 드나들곤 했다. 여름이 와 포트리에 올라오면 번화한 도시생활이라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아 도서관을 찾을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터라 쏘다니기에 분주했었다.   불의의 방청객 팬데믹 이후 그동안 정들었던 플로리다를 떠나 뉴저지로 아주 올라온 것이 어느덧 몇 년이 돼 오는데 세월이 변해 전처럼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친구들도 뜸하게 만나고 하니 늘, 방콕 신세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해서 무심코 전에 가끔 드나들던 도서관을 찾아가니 한국 섹션에 소설, 비소설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책이 꽤 있었다.  무심코 집어 든 책이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란 에세이였다.   이 책은 소설가 박완서가 남긴 660편 중 대표작 35편을 소개했는데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는 책으로 삶의 메시지를 잔잔하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한 달 후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찾으니, 대한민국 언론인 이어령 선생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 있어 빼 들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 기자와의 ‘라스트 인터뷰’로 삶과 죽음에 대한 마지막 인생수업을 잔잔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렇게 2권의 책을 읽고 나니 도서관 가는 길이 즐거워지고 있었다. 더구나 가는 길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로 메인스트리트에 줄지어 있는 가게들을 눈요기로 볼 수 있어 지루하지 않고 책을 들고 오는 발길은 신선하고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긍정의 힘으로 끌고 가는 듯했다.   나는 문득,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남편의 세브란스 선배이신 이성우 선생님의 80세 생신(2010년) 때 제가 붓글씨로 써 드린 ‘노학만리심(老鶴萬里心)’이란 글이 떠올랐다. 그 당시 우리는 플로리다에 살았을 때인데 2007년 남편이 떠나자 플로리다 지인들의 슬픔을 달래느라고 선생님께서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를 우리 플로리다 KGA 멤버들에게 돌리시며 우리 가족을 위로해 주셨다. 이 시(詩)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의 의미도 포함된 좋은 시라고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나는  그동안 고맙고 삶의 용기를 주셨던 이성우 선생님의 팔순에 늙은 학이 마음으로 만리(萬里)를 두루 보살피듯이 골프도 열심히 치시고 만리(萬里)를 날 수 있는 의지로 만수무강하시라고 나의 마음을 전해 드렸었다.   생각하면, 세월이 흘러 어느덧 팔십줄에서도 중반을 넘어가는 요즈음, 모든 면에서 움츠리지 말고 글쓰기, 서예 공부 하기 등 나도 노학만리심(老鶴萬里心)의 의지로 도서관도 열심히 다니고 삶을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풀꽃 시인 나태주 선생의 ‘봄이다, 살아보자’ 책자를 들고 메인스트리트를 신나게 걷고 있었다. 정순덕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플로리다 지인들 우리 플로리다 공공 도서관

2024-09-19

[삶의 뜨락에서] 셸터 아일랜드의 그 저택

노동절 연휴 기간, 막내딸 가족이 셸터 아일랜드(Shelter Island)에 일주일 집을 임대해 부모를 초청했다. 셸터 아일랜드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노동절에 가겠다고 했다.  LIE 끝까지 가서 오리엔트 포인트 방향으로 가면 포도밭이 많이 나온다. 섬 북쪽 바다 거의 끝자락에 그린 포인트가 있고 여기서 페리를 타고 셸터 아일랜드로 들어간다.     셸터 아일랜드로 출발하기 전 갑자기 7~8년 전에 읽은 책이 생각났다. 책장에서 ‘The Manor’(저자 Mac Griswold)를 쉽게 찾았다. 자연주의자이면서 역사학자인 저자는 1984년 카누로 노를 저어 섬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그녀는 섬 남쪽 입구에서 길이 12피트, 둘레 15피트의 박스우드를 발견했다. 순간 그녀는 이 나무가 400년 전에 이곳에 옮겨 심어졌음을 알았다. 저자는 카누를 멈추고 눈앞에 나타난 노란 저택을 바라보았다. 셸터 아일랜드 역사를 말해주는 실베스터 매너(Sylvester  Manor)이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했다.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간단한 메모와 연락처를 남겼다. 며칠 후 집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때부터 이 저택의 숨은 스토리와 셸터 아일랜드 역사를 캐는 수년간의 리서치가 시작된다.     저자는 미국 역사는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찾아 한 편의 논픽션 소설을 펴냈다. (롱아일랜드에 있는 공공도서관은 롱아일랜드를 소재로 하는 책을 반드시 비치하고 있다) 이 저택이 처음 건축된 것은 1666년, 거의 400년 전이다. 저택 문서에는 토마스 제퍼슨과 집주인이 주고받은 서한이 있다. 이 집의 주인은 실베스터 페밀리, 집안에는 1754년 영국 화가 조셉 블랙번이 그린, 실베스터 부인의 초상화가 있다. 실베스터 가족은 10대에 걸쳐 이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은 셸터 아일랜드 에듀케이션 팜(Education Farm)으로 운영되고 있다.   저자는 끈질긴 리서치를 통해 이 집에 노예가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후 묻힌 묘지를 발견했다. 집안에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경사가 급한 계단이 있었는데 이곳에 노예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노예들은 아프리카의 가나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가나를 방문해 400년 이상 전의 흑인 노예 이주역사를 추적했다.     셸터 아일랜드 페리는 자동차를 싣고 승선한다. 그린 포인트에서 15분 정도의 짧은 거리, 24달러 기본요금에 승객 일 인당 6달러를 추가로 받는다. 섬의 면적은 8000에이커, 섬을 한 바퀴 도는 6마일 트레일이 있다. 우리는 두 살 아이가 있어 가장 짧은 Red Trail(1.8 마일)을 걸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로 물가를 도는 가장 긴 트레일 Blue Line이 있었다.   한여름에는 모기가 많아 Bug Spray를 뿌려야 한다. Shelter Island Preserve를 돌고 난 후 책에 나오는 그 저택을 찾았다. 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도로를 들어섰더니 금방 소설 표지에 서 본 집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 아주 큰 저택은 아니었으나 옆에서 자세히 보니 상당히 큰 집이었다. 집은 재단장 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안내판에 Land Bridge, Historic Barns, Windmill Field 등이 있었으나 아무도 없어 돌아보기가 불편해 포기했다.     가장 관심을 가졌던 노예와 원주민 묘지를 보고 싶었으나 관리인이 없어 가보지 못했다. 물가에 수백 년 돼 보이는 나무가 조각처럼 보였는데 이것이 400년 넘은 박스우드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노동절 연휴, 페리는 10분 간격으로 부지런히 차를 싣고 다녔고 식당과 아이스크림 가게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이 섬의 역사를 말해주는 실베스터 매너를 찾는 사람은 그 시간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미국 혁명전쟁 당시 영국군의 침략을 피해 외딴 섬에 숨은 데서 붙여진 이름, Shelter Island. 이제는 숨을 이유 없이 육지에서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작은 섬. 이 섬에서 소설에 나오는 저택을 만난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아일랜드 저택 아일랜드 역사 아일랜드 페리 아일랜드 에듀케이션

2024-09-10

[삶의 뜨락에서] 불과 물의 유혹의 땅 -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Iceland)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크루즈로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후 3일에 걸쳐 북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는 과정에 중소도시에 들려 아이슬란드만이 가진 독특한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수도인 레이캬비크(Reykjavik)에 도착으로 크루즈를 마치고 바로 불과 물의 유혹의 땅을 2박 3일 동안 설렘으로 만났다.     아이슬란드는 역사적으로 노르웨이,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다가 1944년에 아이슬란드 공화국으로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기후는 다소 차가운 해양성 기후로 따뜻한 북대서양 해류가 흐르기 때문에 상당히 따뜻한 편이다. (-3도~13도) 아이러니하게도 이웃 나라인 그린란드(Greenland)가 훨씬 추운데도 불구하고 초록의 땅으로 불리고 좀 더 온화한 기후를 가진 아이슬란드는 얼음의 땅으로 불린다.     아이슬란드에는 오직 두 계절만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긴긴 겨울, 둘째는 여름(6월~8월)이 3개월이지만 Disappointed Season 즉 실망의 계절이라 불린다고 한다. 하루에도 날씨가 17번 변해 누군가 비가 온다고 불평하면 ‘1분만 참아보세요’ 하는 농담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날씨는 자연이 주는 선물로 햇살에 반사되는 투명한 얼음은 다이아몬드보다 더한 광채를 뿜어내고 무지개가 여기저기서 관광객을 황홀하게 만든다.     주민들은 주로 바이킹의 후손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노르웨이인, 영국인, 아일랜드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언어는 아이슬란드어가 사용되고 영어와 덴마크어가 공용어이다. 종교는 루터교가 76%를 차지한다. 군대는 없고 준군사조직인 해안 경비대가 대체하고 있다. 군대는 없지만 항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땅속의 불덩어리와 지진 그리고 용암의 흐름을 피할 방어 태세를 취하고 대피 훈련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뜨겁게 달구어진 지구는 숨통을 화산으로 분출하고 그 후 용암으로 서서히 흘러내리면서, 땅 위의 빙하가 서서히 녹아내려 자연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장엄한 장관이 아이슬란드 전역에 펼쳐져 있다.     지구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이슬란드만의 특유한 풍광 자체가 모두 예술품이다.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어서 어디를 가나 민둥산에 풀만 자라 끝없는 평원을 이룬다. 숲이 생소한 나라이기에 나무 세 그루만 모이면 숲이라 하고 숲에서 길을 잃으면 곧바로 서기만 하면 된다는 가이드 말에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아이슬란드만이 가진 특유한 풍광, 화산 분출의 결과로 흘러내린 용암이 때로는 돌비 형태로 내려 아주 이색적인 경관을 이룬다. 초원에 왠 돌덩어리가 이리 많은지 알아보니 용암과 지진으로 지층이 갈라지고, 패여서 검은 돌산과 돌 절벽 그리고 Black Sand Beach가 형성되었고 이는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지구 내부에는 암석권이 있는데 대략 10개의 판 중 북미와 유라시아판이 여기 아이슬란드를 관통하면서 씽벨리르 국립공원이 생겨났고 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화산활동이 활발하고 지진도 자주 일어나 피오르, 폭포, 칼데라, 크레이터, 간헐천(geyser)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어 땅만 파면 온천이 나온다고 한다. 이 온천 덕택에 동네마다 지열 수영장이 있고 이 나라 전력 생산 2위가 바로 이 지열에서 나온다고 한다. (수력 70%, 지열 30%) 침실 한 개 아파트에 사는 가이드의 전기세가 월 2달러 미만이라고 수줍게 말한다.     아이슬란드의 독특한 풍광은 할리우드 영화계의 종사자와 프로 사진작가들이 가장 탐내는 나라로 여기가 과연 지구인지 외계 행성인지 기괴하면서도 절묘한 장면에 모두 혼을 빼앗길 정도이다. 내가 방문한 7월 말은 한여름으로 백야(일출 새벽 3~4시, 일몰 자정)이어서 오로라는 볼 기회가 없었지만, Perlan Museum에 3D로 시뮬레이션을 해놓고 화산 분출도 다큐멘터리로 보관해 놓은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빙하시대를 체험하도록 얼음 굴도 만들어 놓았다. Awesome! Amazing !!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아이슬란드 유혹 아이슬란드 공화국 아이슬란드 전역 여기 아이슬란드

2024-09-09

[삶의 뜨락에서] 에스키모의 나라 - 그린란드

올해 초부터 직장을 파트타임으로 줄이고 여행을 다니고 있다. 여행하면서도 이를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먼저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삼대 요소는 건강, 시간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맨해튼에서 크루즈를 타고 캐나다 동부 해안선을 따라 노바스코샤(Nova Scotia), 세인트 피에르(St. Pierre), 세인트 존(St. John), 그린란드(Greenland) 그리고 종착지인 아이슬란드(Iceland)까지 14박 15일을 마친 후, 레이캬비크(Reykjavik)에서 따로 2박 3일을 관광한 후에 비행기로 뉴욕에 돌아왔다.     그린란드를 출항해 아이슬란드로 가던 중 승객 한 명이 쓰러져 우선 배 안에서 응급 처치를 한 후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에 있는 큰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우리 크루즈는 항로를 변경해야만 했다. 캡틴은 방송으로 “한 사람의 생명도 중요하기에 불가피한 선택이므로 모든 승객의 이해를 바란다”라고 호소했다. 승객 2348명과 직원 1084명은 엄숙하고 신중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중에 크루즈 마지막 날 어느 한 승객이 그 환자 한 명 때문에 우리는 배 안에 갇혀 하루를 버렸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캡틴과 그 승객의 입장 모두 이해가 된다. 환자 처지에서는 사고였으니 사전 방지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승객 중에는 지팡이나 휠체어에 의존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행은 건강할 때 다녀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스키모(Eskimo)가 이누이트(Inuit)를 비하하는 용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야만인을 표현하는 비하 단어로 받아들이며 싫어한다고 한다. 마치 아시안을 오리엔탈로 부르면 저하의 의미가 있듯이 말이다.     많은 환상과 기대를 안고 그린란드의 수도인 누크(Nuuk)에 도착했다. 이 섬은 세계에서 제일 큰 섬이라고 한다. 지리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정치적으로는 덴마크의 속령이므로 국방이나 외교 서안의 권리는 덴마크에 있지만 자국민들은 지하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사법권, 경찰권, 입법권은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한다. 원주민은 이누이트이고 1721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한스 에게데 일행이 탐험하면서 덴마크령이 되었다. 2009년 6월 21일 독립을 선언하면서 덴마크의 지원이 중단되지만 지구 온난화로 개발 가능성이 커진 지하자원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섬의 81%가 얼음으로 덮여있고 여름 한 철 나무가 자라고 꿀벌과 모기가 많다. 워낙 춥고 살기가 척박한 날씨 때문에 식량은 수입에 의존해 물가가 비싼 편이다. 주요 수출품은 새우, 최근에는 여행산업과 루비와 같은 광물자원을 수출한다.     그린란드의 여름은 2~3주로 짧고 8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백야와 오로라를 보기 위한 관광객으로 붐빈다. 군대는 아예 없고 그린란드인(Inuit)이 85~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예전에 시베리아를 건너온 몽골인종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는 그린란드어와 덴마크어가 공용으로 쓰이고 있지만 2009년 독립선언 이후부터는 그린란드어만 공식어이고 덴마크어는 고등교육의 언어로 남아있다.     누크 시내를 돌아보니 가는 곳마다 아파트와 상업용 건축 붐이 일고 있었다. 조그마한 아웃렛 쇼핑몰도 있고 슈퍼마켓도 있어 전혀 얼음의 나라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특산품점에서는 가죽 표피로 만든 외투와 울로 짠 스웨터들, 부츠, 가죽 모자들이 있었지만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해안가에서는 세 여인이 물개 가죽을 손질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고급 부츠가 최고의 선물이라는 가이드의 말도 이해가 된다. 관광상품으로 원주민 가정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 안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눈에 익은 환경이었다. 삼성 TV, 냉장고, 난방시설에 삼성 스마트폰까지 과연 세상은 바로 원터치로 연결되어 있음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에스키모 그린란드 종착지인 아이슬란드 독립선언 이후 승객 2348명

2024-08-26

[삶의 뜨락에서] 열정과 스트레스

‘열정은 자신이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고 스트레스란 자기 능력 이상으로 목표에 도달하려고 할 때 느끼는 중압감이다.’     Eckhart Tolle의 말이다. 독일 출신의 톨레는 달라이 라마, 틱낫한과 함께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이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 사춘기와 청년기에 극심한 우울증으로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존재의 고통을 안겨주는 허구의 자아를 벗어던지고 깨달음을 얻는 내적 변화를 겪는다. 혼자 ‘깊은 환희 상태’를 방황하던 중에 사람들은 그의 정신세계를 존경하게 되었다. 모든 문제와 불행의 원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자유와 기쁨’에 이르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첫 번째 저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Power of now’와 두 번째 저서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A New Earth’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각각 300만 부와 500만 부가 판매되었다.     내가 그의 책을 접하게 된 연유는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함이었다.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가 나타난다…”는 문구에 눈길이 갔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거대한 돌덩이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쳐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끔 지인들이 나의 바쁜 일상을 보고 ‘너무 스트레스받는 것 아니세요’하고 묻는다. 그래서 찾은 대답이 이 글의 첫 문장이다. 열정과 스트레스 사이, 열정은 즐겁게 신이 나서 하는 일이고 스트레스는 목표에 도달해야만 하는 압박감이다. 열정을 갖고 즐겁게 일을 하다 보면 비전과 목표가 생기고 긍정적인 에너지장에 돌입하게 된다. 열정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은 창조적인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엄청난 강도의 에너지가 동반된다. 마치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기게 된다.     그렇게 열정은 창조적 에너지와 서로 보완 작용을 하며 공명함으로써 예술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강렬한 열정과 스트레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보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두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보통 스트레스는 자존심이 창조적 욕구를 억누르고 목표 달성만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받게 된다. 그 결과 당연히 일은 질과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 결과 불안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며 악순환을 겪게 된다. 그것은 신체에 독이 되고 암과 심장병 같은 질병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있다. 미국 시인 랄프 에머슨은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열정(Enthusiasm)이란 단어는 고대 희랍어의 ‘안’을 뜻하는 En과 신을 뜻하는 theos 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내재하는 신, a god within, 내 안에 신을 둔다는 의미이다. 열정에 불타고 있을 때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없다. 열정 자체가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을 타기 때문이다. 열정은 당신이 하는 일에 무한한 힘을 보태준다. 이렇게 열정에 무한한 힘이 가해지면 위대한 창조물이 탄생한다. 자신도 놀라고 주위 사람들도 경이와 찬탄을 멈추지 못한다.     열정에는 대립이 없다. 열정은 대결하지 않는다. 열정에 따른 행위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포용한다. 열정은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조종할 필요가 없다. 열정 자체가 창조적 힘이기 때문에 다른 도움이 필요 없다. 열정은 자신의 살아있음, 기쁨, 힘의 원천인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다. 누구도 열정 속에서만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지금 하는 일을 즐겁게 하고 그것이 목표와 비전과 결합하면 열정이 생겨난다. 초점은 현재이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열정은 마음속 청사진을 창조적인 마음을 사용하여 물질 차원으로 옮기는 힘이다. 열정을 잃지 않는 것이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비결이 아닐까.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스트레스 열정 스트레스 사이 열정 자체 창조적 에너지

2024-08-12

[삶의 뜨락에서] 마음의 거스러미

발톱 옆에 거스러미가 생겼다. 스치기만 해도 따가워 신경이 쓰인다. 살짝 당겨보니 확 아린 것이 자칫하면 죽 찢어지게 생겼다. 일단은 그냥 두어 보기로 하지만 종일 거슬린다. 거슬려서 거스러미인가. 손톱깎이로 잘랐다. 그런데 며칠 만에 그곳에서 자른 부분이 자라나 또 아프다. 이번에는 손톱으로 뜯어 결국 피가 나고 말았다. 조금 살살 다룰걸. 딴생각을 하다 발등을 계산대 모서리에 콩 부딪쳤다. 외마디를 내지르고 깽깽이를 뛰면서 순간의 통증을 이겨냈지만 한참 뒤에 내려다본 발등의 색이 퍼렇게 변했다. 그제야 욱신대는 것 같기도 하고 뼈에 실금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되어 괜히 절룩이며 조심했다.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생채기와 멍울도 인지한 순간부터 거치적거리고 신경 쓰이고 아프다. 슬며시 궁금증이 들어선다. 그간 몰랐던 마음의 티끌을 우연히 발견했다.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영 부담스럽게 알아 버렸다. 과연 우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멍과 거스러미는 어떻게 어루만지고 있을까.   우리 가게에 자주 오는 루시는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 25년을 재직하고 62살에 은퇴했다. 아직은 젊고 힘이 넘친다. 일주일에 3일 운동하고 가끔 복지회관에서 봉사 활동하고 94살 친정어머니 집에 들러서 이야기하고 일주일에 두 번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의사에게 체중조절 침을 맞는다. 입으로는 바쁘다고 하지만 너무 일찍 퇴직한 걸 후회한다. 일할 때는 상사의 잔소리도 귀에 거슬리고 동료와도 사이가 서먹하고 출퇴근도 번거로웠지만 퇴직하고 보니 귀찮게 여겼던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시간이 많으니 사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많아졌다.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는 25년 이상 근속하면 세계 어느 곳이든 비행기가 무료다. 1주일씩 현지 관광 경비도 많이 들고 호텔비 하며 씀씀이가 커져 퇴직금을 야금야금 꺼내 쓰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루시가 가게에 오면서 색다른 이야기, 내가 모르는 미국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경험, 유머 같은 것을 좋아했다. 가게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좀도둑도 지켜주고 나도 일하면서 심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루시가 가게에 와서 간섭하고 내 시간을 빼앗는 느낌이 들면서 거슬렸다.   동네 소식이 빠른 루시가 가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 교회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쓰지 않는 물건을 팔겠다고 했다. 하루 자리 사용료가 30달러. 미국 사람들은 이사를 하면서 거라지 세일을 한다. 그 사람들이 살면서 요긴하게 썼지만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세일을 한다. 가끔 좋은 것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행운도 있지만 요상한 물건을 누가 살까 하는 의구심도 많다. 오늘 첫날인데 80달러를 팔았다고 좋아한다. 무엇을 팔았냐고 물었더니 어렸을 때부터 모은 동물 인형이다. 이제는 방구석에 쌓아놓은 인형들이 거슬려 치워버렸더니 속이 시원하다고 털어놓는다. 다음 주는 우리 가게에 찾아가지 않은 옷들을 주겠다고 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옷들은 언젠가 찾으러 오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쓸 만한 옷들이 제법 많다. 테이블에 펼쳐놓고 접어서 옆에 놓고 줄을 만들어 걸어 놓으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사갈 것 같다. 눈에 띌 때마다 정리해야지 외치며 마음속으로 무척 거슬렸는데 빈자리를 쳐다보니 막혔던 파이프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이제는 루시와 조금 거리를 두었다. 한결 편해진 나의 마음을 지킴과 동시에 오히려 가끔 듣는 루시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거스러미도 생긴 이유가 있지 않을까. 건조하다든지 거칠게 다루었다든지. 타인의 문제점에는 명확한 훈수를 두고 자처해 상담해 주기도 하면서 왜 내 마음에만 가혹한지. 발톱 옆에 거스러미도 슬금슬금 달래 뜯을 걸 혼자만의 괭이질이 너무 힘들거나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거스러미 마음 유나이티드 항공사 우리 가게 계산대 모서리

2024-08-05

[삶의 뜨락에서] Body Language

오래간만에 만나면 얼굴부터 쳐다본다. 나이 든 사람들은 금방 상대방이 건강한지 안다. “아직 그대로이시군요” 하면 건강하게 보인다는 의미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어디가 아픈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보디 랭기지는 단순한 동작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보면 얼마나 늙었는지 짐작할 수 있고, 자세와 걸음걸이를 보면 건강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배가 많이 나오고 뚱뚱한 사람보다 약간 말라 보이는 사람의 건강상태가 양호하다. 흰 머리가 많으면  늙어 보이지만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에는 Verbal Communication과 Non-verbal Communication이 있다. 보디 랭기지는 말로 표현하지 않는, 표정, 사람과의 거리, 시선, 자연스러운 웃음과 억지 스마일, 음성이 주는 느낌 등 총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대통령 선거 TV 토론에서는 보디 랭기지가 정책 논쟁보다 유권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준다. 1960년 케네디-닉슨 토론을 라디오로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이긴 줄 알았다고 한다. TV를 본 사람들은 케네디는 건강하고 날카롭게 보였는데 닉슨은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해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유권자들은 복잡한 정책 차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후보가 주는 이미지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 후보사퇴의 결정적 계기는 그의 처참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노출한 TV 토론이었다. 바이든은 힘없는 쉰 목소리, 초점 잃은 표정, 문장을 연결하지 못할 정도로 더듬거렸고, 단상에서 갈팡질팡하는 불쌍한 모습을 5000만 미국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바이든은 결국 민주당 지도자들, 후원자,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의 비판에 쫓겨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그의 보디 랭기지는 그의 나이, 스태미나, 정신건강 상태가 선거운동은커녕 남은 임기를 맡기는 것조차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민주당 후보 지명이 확실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앞으로 있을 TV 토론에서 훨씬 강한 이미지를 줄 것이고 선거전은 예측 불가한 접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종류의 비즈니스 성패를 좌우하는 능력이다.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주어진 지식이나 정보를 분석하고 효과적으로 소비자에게 전하는 능력은 컴퓨터가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큰 기업들은 소통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CEO로 영입한다. 한인들의 비즈니스와 단체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고 소통력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본다. 요즘은 업소마다 한인 고객을 넘어 다민족 고객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영어 구사력을 포함한 좋은 소통, 보디 랭기지는 성공의 주요 요인이 된다.     개인적으로도 사람 전체적으로 주는 이미지는 중요하다. 여자분들은 얼굴 화장, 옷차림, 표정 관리가 중요해 어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훈련을 한다. 얼굴을 보면 어느 정도 사람을 알 수 있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진실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진실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language body verbal communication 닉슨 토론 보디 랭기지

2024-07-31

[삶의 뜨락에서] Trust

모두 눈을 감고 깊은 명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Trust, Trust, Trust.” 요가 선생의 나지막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주 힘든 요가 자세 중에 “Listen to your body, don‘t over do but trust yourself. Trust makes everything possible”이라고, 한다. 정말 믿기 어렵게도 그동안 힘들었던 tree pose가 훨씬 수월하다.     깊은 상념에 빠진다. 맞다. 스스로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는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그동안 우리 인류사는 모두 사랑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예술과 문학 작품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trust(믿음, 신뢰)가 없는 사랑은 왠지 늘 불안정하다. 신뢰가 쌓인 다음에 사랑의 싹이 피어오르면 그 사랑은 오래 지속할 것이다. 사람은 원래 태어날 때 모든 가능한 성품의 씨앗을 갖고 태어난다. 마치 여성이 이미 수억 개의 난자를 갖고 태어나듯이 말이다. 이 씨앗은 적절한 환경을 만나면 발아가 되어 꽃을 피울 수도 있고 아니면 그대로 사장될 수도 있다.     Trust는 또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개인의 삶을 떠나 대인관계에서 신뢰는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가족 간에, 친구 사이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신뢰는 building block이라 할 수 있다. 거의 20년 전에 요가 강사 수련회가 베어마운틴에서 있었다. 그중 한 프로그램으로 둘씩 짝을 지어 산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에게 눈가리개가 주어지면서 둘 중 한 사람의 눈을 가리게 했다. “자 이제부터 눈이 보이는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저 산의 정상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눈가리개를 쓴 사람은 상대방을 100% 신뢰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라는 지시가 있었다. 우리 모든 일행은 너무나 황당한 이 지시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잠시 짝꿍과 상의를 한 후 서로의 역할을 정했다. 지금은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 산행이 훨씬 수월하지만 2003년에는 제대로 길이 나 있지 않아 바위, 돌, 자갈, 쓰러진 나뭇가지들, 튀어나온 뿌리들이 진흙더미와 범벅이 되어 눈을 뜨고도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거의 40명이 되는 우리 일행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땀범벅이 된 채 상기된 얼굴로 정상에 올랐다. 실로 Trust의 아름다운 결실이었다.     인도하는 자와 따르는 자 사이의 완전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믿음, 신뢰, 신념, 신용, 신탁으로 번역되는 Trust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산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은 그는 정직하고 성실해서 고의로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대인관계에서 신뢰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대방의 좋은 의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할 때 깨지게 된다. 특히 금전 관계에서 실패하게 되면 영원한 불신을 초래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법적인 의미의 Trust는 자신이 평생 모아둔 자산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준비 과정으로 생전에 ‘Trust’를 설립해 두지 않는다면 ‘Probate’라는 법원을 통한 상속 절차를 거쳐야 하며 이에 드는 경비와 시간은 비효율적으로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Trust’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만든 재산을 보호하고 유산관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제도이다.     지금까지 세종류의 Trust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 대한 믿음, 대인관계에서의 믿음. 그리고 법적인 용어인 Trust까지,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갖고 태어나는 자산 중에 성실을 최고로 삼는다. 가장 쉽고도 순박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박한 자산이다. 나는 성실한 사람과 금방 친해질 수 있다. 성실한 사람은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성실은 신뢰를 얻게 한다. 신뢰는 모든 것의 기본으로 시작을 만들 수도 있고 끝을 예고할 수도 있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trust trust makes trust yourself trust trust

2024-07-29

[삶의 뜨락에서] 잊혀버린 소중한 순간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특별한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 순간은 때때로 삶의 회전판 위에서 소비되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희미한 듯 선명하게 작은 햇살을 띄워준다. 나에게도 그러한 소중한 순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세상이 어둡게만 느껴질 때 그늘진 마음을 이내 밝혀 주었던 작은 빛과 같았다.     오래전 이사를 했었는데 사방으로 울타리가 여러 가지 다른 나무로 되어있었다. 옆집과 칸막이가 되어 우리 식구만 즐길 수 있는 공간 뒤뜰이 너무 좋았다. 울타리 밑으로 잡풀이 나고 지저분해서 풀들을 뽑았다. 그때는 포이즌 아이비도 몰랐고 포이즌 아이비 풀도 몰랐다. 며칠이 지나고 손, 팔뚝, 다리 할 것 없이 노출된 부분이 가렵고 불긋불긋 두드러기가 돋아나더니 가렵고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박박 긁고 나면 잿물도 나고 보기에도 흉했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어찌할 바도 모르고 있는데 손님이 내 팔뚝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가게에서 나갔다. 10분 후에 다시 왔다. 손에서 선 테인 로션 같은 것을 주면서 가려운 곳에 바르라고 한다. 너무 고마웠다. 모르는 손님인데 치료 약을 주다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빼앗다시피 받아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려운 곳에 발랐다. 이게 웬일인가 금세 가려움이 멈추면서 빨갛게 부어오른 팔뚝을 보며 의자에 주저앉아 무슨 약인지 그때야 보였다. Hydrocortisone lotion USP. 포이즌 아이비가 얼마나 지독한 세포 반응을 일으키는지 약을 바르면 좀 수그러들다 약 효과가 떨어지면 또 가려워서 견딜 수 없는 얄궂은 알레르기 병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무리 찰나의 순간이었다고 허더라도 그때 그 순간은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아 선명한 빛깔로 남아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나는 늘 평온하고 충만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샘솟음을 느낀다. 한 번만 더 우리 가게를 찾아오면 보고 싶었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데 그 뒤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질도 변하는 모양이다. 올해는 햇볕이나 날씨가 90도가 넘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솟아나 가렵고 따가워서 견디기 힘들다. 포이즌 아이비는 아닌데 증상이 똑같다. 우연히 그 약이 생각났다. 서랍을 뒤졌는데 그 약병이 보였다. 유효 기간이 2010년이다. 그런데 아직도 약이 조금 남아 있었다. 뚜껑을 열어 가려운데 살짝 발랐더니 가려운 기가 없어졌다.     그 약을 사려고 약국에 갔다. 약병을 보이며 똑같은 약을 사려고 약사에게 다가갔다. 약사는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가게로 돌아왔다. 그 약병을 가지고 딸에게 처방전을 부탁했다. 펄쩍 뛰듯이 그 약은 처방할 수 없단다.     코티손이라서 바르면 안 된다고 했다. 매일 바르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기가 나와 가려우면 바를 테니 처방해 달라고 했으나 못 해준다며 방문을 닫아 버렸다. 무척 서운했다. 딸이라고 애원했는데 퇴짜를 맞다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또 햇볕을 받고 걸었더니 팔꿈치 접히는 안쪽 팔뚝에 두드러기가 돋아나기 시작하면서 가려웠다. 집에 와서 화장실에 있는 서랍을 뒤져보니 캄비손 연고가 보였다. 유효기간이 지났다. 그래도 조금 발랐더니 가려움과 통증이 멎었다. 캄비손 연고를 팔뚝에 바르면서 그 손님의 온정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일상에서 잠시 잊혀버린 순간 일지라도 소중한 경험이 내게 커다란 울림과 단단한 힘이 되어 주었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포이즌 아이비 팔뚝 다리 안쪽 팔뚝

202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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